퇴계 이황이 '당신이 나보다 한 수 위다'라고 칭찬한 고봉 기대승. 우리는 조선시대의 대성리 학자 퇴계 이황 선생은 기억하지만 그와 쌍벽을 이뤘던 고봉 기대승 선생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경상도에 퇴계가 있었다면 전라도에는 고봉이 있었다.
고봉 선생의 탯자리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두정동이다. 고봉 선생은 열심히 글을 읽어 32세에 과거에 응시해 문과의 을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여기서 퇴계 선생을 만나게 된다. 고봉 선생은 퇴계 선생과 첫 대면에서 '바른 선비의 처세'에 대해 물었다. 퇴계 선생은 "자신이 깨끗하고 옳은 일만 하면 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선생은 조선 건국 이래 조선이 앓아온 내부 모순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기대승 선생의 이런 끊임없는 비판의식과 대쪽 같은 성품은 자신을 결국 외롭게 만들고 44세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게 만든다.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을 결심한다. 기대승 선생은 선조에게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쳐줄 것을 강조하고 짐을 챙겨 한양을 떠났다. 그런데 천안쯤 도착하자 볼기에 종기가 나기 시작했다. 살을 베는 아픔을 참고 태인에 도착한다. 병 소식을 듣고 선조가 약을 지어 보냈으나 약이 채 도착하기 전에 객사하고 말았다. 선조는 모든 장례비용을 보내 임곡동 너부실에 안치하도록 했다.
선조에게 있어서 선생은 깐깐하고 고집불통 신하였지만 평생 의리와 강구를 본분으로 삼은 그를 잊지 않았다. 선조는 기대승 선생이 경연에서 강의한 것을 모두 상고하여 등사 해 내고 책으로 엮었는데, 그 책이 바로 <논사록>이다. 이 책에는 기대승 선생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논리 정연한 학설과 민심을 바로 잡으려는 성리학의 도가 담겨있다.
선생이 임금에게 강조한 것은 언로였다. 기대승 선생 이전에도 많은 선비들이 언로 개통을 말했지만 모두 촉구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것의 궁극적인 책임은 사대부 특히 지식인에게 묻고 조정이 언로를 막으면 지식인이 목숨을 걸고라도 능동적으로 항거해서 뚫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언로 개통책을 내놓았다.
이러한 대단한 인물, 고봉 기대승 선생을 기리고 있는 곳이 월봉서원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 위치한 월봉서원은 기대승 선생을 제향 하는 서원 이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장남인 기효증이 선친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광산구 산월동 월봉마을에 창건하여 마을 이름을 따서 월봉서원이라 불렀다. 그 후 정조가 기대승 선생을 상징하여 '빙월설월'이란 뜻으로 빙월당 액호를 하사 하였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헐리고 1938년에야 지방 사람들이 빙월당을 복원하면서 광산동으로 옮겼다. 지금은 이곳에 장서각과 사우가 있고 동서제가 완공되어 월봉서원이란 이름으로 선생을 봉향하고 있다. 빙월당과 <고봉문집> 목판은 시 문화재이다.
월봉서원 마루에 걸터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기대승 선생의 대중 철학이 절절히 느껴진다. 위와 아래가 통하지 않은 답답한 시대를 살다간 고봉 기대승 선생의 고민과 외침이 얼마 외로운 것이었는가를 느끼게 된다.
기대승 선생의 결정체가 민중이고 고루 잘사는 사회 구현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있는 듯 하다.